한자와나오키, 이케이도 준
4권까지 국내 번역 출간된 일본 소설. 기업 금융 담당 은행원이 주인공이라 금융 스릴러라는 색다른 장르가 된 듯하다. 작가도 은행원 출신이라 그런지 나름 현실감 있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
빌리언스, 빅숏 등 금융 분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재미있게 본 경험이 있어, 금융 분야를 소재로 한 소설을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작품인데, 도서관에 대출이 가능할 때마다 빌려 3권을 내리읽어나갈 만큼 재미있다. 다만, 소재가 소재인 만큼 기업 금융(여신, 대출)이나 회계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면 진입장벽이 있을 듯하다.
대형 법인에서 회계사 생활을 하며, 일반 기업의 속살을 들여다본 경험, M&A나 투자 업무, 이직 후에 사업 개발, 투자, 심사 등 업무를 해 본 내 입장에서는 신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1권에서는 대출을 받은 뒤 자금 횡령과 고의부도를 내고 잠적한 상대방을, 2권에서는 호텔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과 그 주변에서 부당한 대출로 자금을 횡령하려는 은행원을, 3권에서는 적대적 M&A와 분식회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주요 이야기로 다룬다.
작가인 이케이도 준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등장인물 간의 갈등관계나 나중의 반전을 위해 숨겨둔 복선, 결말을 찾아내기 위한 실마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스타일의 책이 아니다. 골치 아픈 생각 없이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눈팔 틈 없이 속 시원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 스타일이다. 주말 반나절이면 한편 읽는데 충분할 정도.
소재만 봐도, 기업금융을 담당하는 은행원이나 증권사 직원, 회계사 또는 자금 업무를 담당해 본 적이 있는 회사원들이 재밌게 읽어나갈 만해 보이지 않은가. 거기에다, 우리나라와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는 직장 문화, 갑을관계, 직장 내 상하관계, 사내 정치도 이야기의 큰 줄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을 뿐더러, 성장이 멈추고 활력을 잃고 관료화가 심화되는 조직 분위기와 문제점도 다뤄지고 있다. 게다가 40대로 추정되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처한 입장, 발령지에 따라 이사를 가며 가족들의 어려움을 고민하는 모습이나, 조금이라도 좋은 보직, 발령지를 얻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들도 이야기의 소재거리로 다뤄진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그 배경과 인물들의 상황이 40대 직장인인 내 입장에서 쉽게 공감되고 익숙하다보니 쉽게 읽어지면서도, 편하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불편한 심정을 감내하고서라도 읽어볼 만큼 순수한 재미를 이유로 추천할만 하다.
직장생활 10~15년 정도 하다 보면 누구나 술자리에서 안주거리 삼을 만한 무용담 하나씩은 가지게 되지 않던가. 나만 해도, 사채꾼과 조폭이 얽혀 망가진 회사의 상장 폐지되는 모습을 감사인 입장에서 바라본 적도 있고, 기술력에 집중해 선대가 일궈온 회사를 어설픈 마케팅만 외국 유학길에 공부해온 젊은 후계자가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사기꾼을 만난 적도 있고, 수천억의 부를 일궈낸 북미권 투자자의 파티에 얼굴을 드밀어 본 적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가 될 텐데, 가끔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을 정도의 재주밖에 없는 내 역량이 아쉽다. 나도 이 소설의 작가인 이케이도 준 같은 이야기꾼 소질이 있다면, 내 직장생활 경험만으로 연작소설 네댓 권 정도 쓸 만한 소재는 가지고 있을 터인데.
그 재능이 부러울 뿐.
도서관에 4권 들어오면 바로 빌려봐야겠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추천드립니다.
덧. 처음엔 한자와 나오키라는 제목을 "한자"와 "나오키"로 읽어, "한자"라는 사람과 "나오키"라는 사람 두 명의 주인공이 펼쳐나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자와"씨 더라.